뚜쓰엉거리는 남끼꺼이냐(Nam Kỳ Khởi Nghĩa)길에서 시작해 깟망탕땀(Cách Mạng Tháng Tám)길에서 끝나는 대략 1024 미터의 길이이며, Le Quy Don, Tran Quoc Thao, Truong Dinh, Ba Huyen Thanh Quan, Nguyen Thong 거리와 교차한다. 예전에 이 거리에는 수녀원을 비롯해 큰 빌라들, ‘Cong Giao’ 교회가 자리했다. 1975년 이후부터 이 빌라의 대부분은 고위 관리층에 의해 관리 및 보존되고 있다. 3군 내 자그마하고 조용한 동네 중 하나인 이곳은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잘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알려진 바가 크게 없는 편이다. 현재에 이르러서야 많은 옛 건물들이 카페로, 레스토랑으로, 빠르게 변모하며 변화에 합류하고 있으며 구석진 골목 사이로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는 작은 카페들, 영국국제학교, 고급 철판요리 전문점 등이 자리하고 있는 한적한 동네 중 하나다.
수 많은 실패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진정한 문학가 뚜쓰엉 1871 ~ 1907년
본명은 쩐주이쑤엔 (Trần Duy Xuyên)으로 1871년 8월 10일에 남딘 미록군비쑤엔에서 출생, 자는 막짜이(Mặc Trai), 시호는 몽팃 (Mộng Tích) 으로 이후에 쩐뚜쓰엉(Trần Tú Xương)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뚜쓰엉은 매우 머리가 좋고 풍자를 즐긴 사람이나 일생동안 시험에서 계속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8개 과에서 모두 낙방했으나 훗날 시험의 실패와 가난한 가정 환경은 오히려 뚜쓰엉의 작품 활동에 많은 소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세살이던 해인 1873년, 프랑스의 첫번째 하노이 침공에 이어 남딘의 공격이 이어지기도 한다. 1896년에서야 판딘풍 (Phan Định Phùng) 항쟁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프랑스 반대 단체들의 활동은 다 끝난 것처럼 보였다. 1897년 프랑스는 베트남 통치를 위한 기초작업을 시작했고, 뚜쓰엉은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확립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사회적으로 국민들이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맞은 시대에 살면서 새롭게 성장했다. 교회들은 그 당시 사회모습과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작품들을 활발하게 기록했다. 뚜쓰엉 또한 다양한 작품을 썼지만 많은 작품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는 약 151편의 다양한 베트남어 작품을 남겼고 몇 편의 시조를 번역하기도 하는데 일찍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작품활동을 온전히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은 19세기 마지막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의 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경종을 울린 인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