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말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오는 하얀 눈들이 전해 주지만, 계절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 상하(常夏)의 나라에서는 비록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지만 성탄절 장식이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사이공의 거리에는 명절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시내 중심가의 거리 조명들이 이미 불을 밝히고, 상인들은 건물마다, 상점마다, 고객의 눈이 닿는 곳을 찾아 흰눈과 붉은 고깔모자를 그려넣고 한껏 분위기를 띠웁니다. 고급 주택가에서는 개인 집에도 화려한 조명과 장식들을 외벽까지 두리워져 있고, 저녁마다 불을 밝혀 이웃과 집 앞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연말 인사를 건냅니다. 베트남인들의 뛰어난 사교성이 빛을 발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요란한 성탄 장식이 던져 주는 감흥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오랜 세월을 보내도 상하의 크리스마스가 여전히 낯설기만 한 이방인에게, 그 화려한 장식들이 ‘그러면 왜 이 낯선 거리를 떠나지 않느냐’ 고 묻습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바로 그 질문입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이 답을 구할 수 있을까요?
산타보다는 비키니의 나신이 어울릴 것 같은 계절에 뜬금없이 다가선 화려한 성탄 장식들, 이들이 이방인을 상대로 쏟아내듯 던져대는 대화들이 귀전을 맴돌다 가슴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곤 수시로 소리없는 사이렌이 되어 경고음을 던지곤 합니다.
지난 해의 일들을 돌아보고 반성하라는 권유의 사이렌, 해가 넘어가도록 미뤄 둔 일들을 다시 일러주는 재촉 사이렌, 새해의 계획을 묻는 확인 사이렌,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일깨우는 알림 사이렌들이 서로 돌아가며 울며 자칫 휩쓸리기 쉬운 연말 연시의 방만과 답보 그리고 세월 가는 것이 결코 반갑지 않은 나이가 만들어내는 침잠(沈潛)의 욕구를 질타합니다.
이런 사이렌 소리가 마음 속에서 들리는 것은 아직 세상과 교우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과 교우하고 있는 동안은 그 삶에 큰 위험이 다가서지는 않습니다.
세상,
그곳에는 서로 사랑하고, 함께 손을 잡아주고 그리고, 당신의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나눠 가질 이웃과 친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산수 문제는 신과 이웃에게서 받은 은혜를 세어보는 일이라고 합니다.그러고 보니 이 세상은 그런대로 살만한 곳입니다. 단지 어떻게 살 것인가?, 즉 어떤 인생을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자신이 만들어가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누구의 말인지 기억도 없고 인용한 문구의 표현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일단 내용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미래를 모르고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를 비웃는 듯 보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가치는 자신의 만들어가는 미래의 모습에 대한 믿음으로 저울질되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미래는 만들어 질 수 있는 영역인가?”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이 곧, 벽에 설렁한 흔적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 허연 흔적은 새 달력이 다가와 가려 줄 것이라고 믿고 있겠죠. 비록 자신이 가진 360여일의 날을 다 소진하고 물러 가지만, 곧 이어서 다가오는 다음 해가 다시 그 빈 시간을 채워주는 것을 확신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자리를 바꿔보려 합니다. 달력으로 가려져 있던 벽의 속살이라도 바라보며 스스로 주어진 과제, 미래 만들기를 잊지 않으려 합니다.
고작 달력의 자리를 바꿔준 것이 자신이 만든 미래의 모습 중에 하나라고 우겨댑니다.
그리고 달력을 한 장씩 넘기면서 매달마다 있는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의 생일과 기념일을 마크한 후, 그날이 되면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식의 의상을 입고,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눌 것인지를 미리 상상하며 정해두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넣거나 메모를 남겨두었다가 그 때가 오면 자신이 계획한 것을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떠하신가요? 이것이 익숙해지면 미래 만들기의 기초과정은 이수한 인생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 후로는 자신의 응용력과 관심이 미래를 만들어 줍니다.
“결국 미래를 만든다는 것은 현재 자신이
속한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
그런데 이 작업에는 또 다른 조건이 따릅니다. 자신의 힘으로 변화가 가능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그런 불가함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건 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진정으로 실현 가능한 자신의 미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석과 변명의 포장이 완전히 배제된, 객관적 시각에 드러나는 민낯의 모습을 정면으로 만나는 용기와 벌거벗은 나신을 드러내고 이것에 자신이라고 인정하는 성숙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긴 평생을 통해 이 성숙함만 이루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될 듯합니다.
이런 영어 문장이 있더군요.
Lord, Give me Coffe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Lord give me) Wine
to accept the things I can’t.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는 커피를 주고,
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는
그것을 덤덤히 수용할 수 있도록
와인을 제게 주소서.
뭐 이런 얘기입니다.
내년에는 커피와 와인 중에
어느 것을 더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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