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라 모더존 베커
전에 한 집의 남매를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딸보다는 아들아이가 미술적 재능이 많았지만 그들의 부모님은 결국 딸아이 혼자만 미술을 전공시키고자 했습니다. 왜 재능 있는 아들은 미술을 안 시키는지 물어보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국에서 남자가 미술을 전공해서 살기에는 너무 빡빡하고 삶이 안정적이지 못할 것 같아서요.”
이렇게 미술을 전공하는 여학생이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미술은 여자애들이 하는 거야.” 라는 말을 듣고 자랐거나 “미술을 하면 돈도 못 벌어.” 라는 선입견도 그 이유 중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미술을 전공하는 여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왜 이렇게 많은 여학생들 보다는 수적으로 열세인 남학생들이 더 많이 작품 활동을 하고 화가로 살아남을까요?
사실 미술사 속에는 여성 작가들보다 남성 작가들이 월등히 많다는 것, 모두 알고 계시죠? 사실 역사가 남성들의 역사였던 것처럼 미술사 역시 남성들의 미술사였습니다. (학창 시절 history는 남성 중심의 역사라 his+story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그럴듯한 설명에 이 글을 쓸 때까지도 아무 의심 없이 ‘그런가보다’ 했었는데, 알고보니 ’histor(고대 그리스 국가에서 자문해주는 연장자)’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굵직굵직한 작가들의 이름들입니다. 남성들보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여성들의 작품 활동과 작품 속 소재에 대한 제한과 대학 입학과 사회적 진출의 기회도 폐쇄적이고 많은 제한이 있었기에 여성 화가들이 세계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지는 얼마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이 더 뜻 깊게 느껴집니다.
소개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파울라 모더존 베커’ 입니다.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죠? 베커는 1876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표현주의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대표작 ‘여섯 번째 결혼 기념일의 자화상’ 을 ‘20세기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생애’ 라는 화집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당연히 남성 화가가 자신의 부인을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신한 부인을 엄청 사랑했나보다’ 하고요. 그림의 인물과 색감, 구도, 분위기 모두 다 빼놓을 것 없이 마음에 들어서 찬찬히 읽다가 너무도 놀랐습니다. ‘헉, 여성 화가였어.’ 그 책이 소개한 100명의 작가들 중 여성 작가들은 14명만 소개가 되어 있어서 이름만 보고 제 머리 속에 당연히 남성 화가일꺼라는 선입견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자화상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녀의 이 자화상은 그녀가 임산부가 아닐 때에 그린 작품입니다. 그 시대에 임산부가 아니면서 임신한 모습을 누드로 그린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스물 다섯에 결혼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5년 후에 이혼을 선언하며 파리로 떠납니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떠났다기 보단 안정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예술가로서 변화를 위해서 떠났다고 합니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이 그림의 작업을 마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30세가 되는 해에, 여섯 번째 결혼 기념일 이 그림을 그리다.”
그 후 남편과 파리에서 재회하고, 그녀가 미리 그렸듯이 원하던 임신을 하게 되어 예쁜 딸을 낳습니다. 그리고 산후 후유증으로 18일 뒤에 32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가 작품 활동을 한 기간은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이름을 미술사 속에 남겨 놓았습니다.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그녀가 더 오래 살아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더 크게 이름이 남겨지고 지금 더 많은 이가 그녀의 그림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구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수학을 잘한다’ ‘미술이나 음악은 여학생이 더 잘한다.’ 이런 선입견이 담긴 말들이 참 많지만 너무나 의미 없는 말들인 것 같습니다. 남성이냐 여성이냐 따지는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결국은 누가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몇 일 전에 어떤 의미 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인생의 반을 일을 하면서 보내게 될텐데 그 일을 단지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보내는 건 너무 아깝지 않냐는 글이었습니다. 선입견 없이, 성별에 관계 없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선택하며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 칼럼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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